스포츠/Serie A

[Seria A] 유벤투스 FC를 알아보자

devhooney 2025. 2. 1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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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에 A에서 유일하게 별을 3개나 가지고 있는 팀

유벤투스

 

이 팀에 대해서 알아보자 !!

 

 

 


1. 역사

아이디어의 힘
모든 것은 토리노 시내 중심부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중 하나인 코르소 레 움베르토의 벤치에서 시작되었다. 한 무리의 친구들이 이 벤치에 모였다. 그들은 모두 축구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축구는 당시 영국에서 ‘수입’된 특별한 스포츠였다.

이들은 한 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스포츠 클럽을 창단하는 것.

이 소년들은 고전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마시모 다젤리오'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교육을 잘 받았지만,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조차도 겨우 17세에 불과했다. 이 젊음이 바로 클럽의 이름을 결정짓게 되었다.

라틴어에서 'Juventus'는 '젊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지만, 1897년 11월 1일, 전설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https://www.juventus.com/en/club/history/the-story-of-a-legend

 

그리고 그렇게, 이탈리아 최고의 축구팀이 탄생했다.  
거의 우연처럼 탄생한 이 클럽은 결국 이탈리아 최고의 축구팀이 되었다.  
첫 번째 회장은 엔리코 칸파리(Enrico Canfari)였으며, 첫 번째 경기장은 피아차 다르미(Piazza d’Armi, 퍼레이드 광장)였다. 당시 유벤투스 선수들은 핑크색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섰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클럽은 1900년 이탈리아 전국 챔피언십에 데뷔했다.  
그리고 3년 후, 영국 노팅엄에서 온 흑백 유니폼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 후, 유벤투스는 제노아(Genoa)와 밀라네세(Milanese)의 강력한 경쟁을 뚫고 첫 번째 이탈리아 챔피언십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당시 회장이었던 알프레도 딕(Alfredo Dick, 스위스 출신)은 여러 불만과 선수단 내 갈등 끝에 클럽을 떠났다. 그는 이후 토리노 FC를 창단하며, 유벤투스의 뛰어난 외국인 선수들을 데려갔다.  

유벤투스는 이후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프로 베르첼리(Pro Vercelli)와 카살레(Casale) 같은 새로운 강팀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벤투스는 다시 영광을 되찾았다.  
특히 골키퍼 자코네(Giacone), 수비수 노보(Novo)와 브루나(Bruna)는 유벤투스 선수 중 최초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이 시기의 회장은 시인이자 학자였던 코라디노 코라디니(Corradino Corradini)였으며, 그는 1960년대까지 사용된 유벤투스 공식 응원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923년, 유벤투스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다
1923년은 유벤투스 역사에서 특별한 해였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잔피에로 콤비(Giampiero Combi)가 1군 데뷔를 한 해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유벤투스의 위상을 완전히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같은 해 7월 24일, 주주총회에서 FIAT 창립자의 아들, 에도아르도 아넬리(Edoardo Agnelli)가 유벤투스의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제 유벤투스는 코르소 마르실리아(Corso Marsiglia)에 자신들만의 경기장을 갖게 되었다.
비록 관중석이 단순한 벽돌 구조물에 불과했지만, 유벤투스를 응원하는 팬들은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클럽에는 이미 콤비(Combi), 로제타(Rosetta), 무네라티(Munerati), 비가토(Bigatto), 그리고 그라비(Grabbi)와 같은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축구 정상을 향해 올라갈 탄탄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유벤투스는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을 영입했다.

- 첫 공식 감독, 헝가리 출신 예뇌 카롤리(Jeno Karoly)
- 첫 번째 세계적인 외국인 선수, 헝가리 출신 왼쪽 윙어 히르저(Hirzer)
이들은 유벤투스의 성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25/26 시즌, 두 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다
1925/26 시즌, 유벤투스는 두 번째 스쿠데토(이탈리아 리그 우승)를 차지했다.
우승까지의 과정은 극적이었다.
지역 결승전에서 볼로냐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둔 유벤투스는,
전국 결승전에서 알바 로마(Alba Roma)를 상대로 합산 스코어 12-1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30~1935: 황금기의 시작
1930년부터 1935년까지,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축구계를 지배했다.
5년 연속 스쿠데토 우승을 차지하며, 다른 팀들과 격차를 벌렸다.

이 위대한 '황금 5년'의 핵심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감독: 카를로 카르카노(Carlo Carcano)
주요 선수들:
오르시(Orsi)
칼리가리스(Caligaris)
몬티(Monti)
체사리니(Cesarini)
바를리엔 I & II(Varglien I & II)
베르톨리니(Bertolini)
페라리(Ferrari)
보렐 II(Borel II)
국가대표팀에도 큰 기여
이 시기, 유벤투스 선수들은 1934년 로마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유럽 대항전 첫 도전
1930년대에 접어들며 유벤투스는 처음으로 유럽 무대에 도전했다.
현재 UEFA 챔피언스리그로 불리는 유러피언컵(European Cup)에 출전한 것이다.
비록 행운은 따르지 않았지만, 4번의 준결승 진출을 이루며 국제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시작된 유벤투스의 성공
유벤투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한 번 성공의 길을 걸었다.

1935년, 당시 구단주였던 에도아르도 아넬리(Edoardo Agnelli)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1947년, 그의 아들 조반니 아넬리(Giovanni Agnelli)가 유벤투스의 새로운 회장이 되었다.

1950년대, 스쿠데토를 향한 질주
당시 유벤투스의 핵심 선수들은 다음과 같았다.

카를로 파롤라(Carlo Parola)
덴마크 듀오: 존 한센(John Hansen), 프레스트(Praest)
가장 주목받은 선수: 잔피에로 보니페르티(Giampiero Boniperti)
수많은 팬들의 응원 속에서 유벤투스는

1950년
1952년
두 차례 스쿠데토(이탈리아 리그 우승)를 차지했다.
새로운 회장의 등장과 변화의 시작
1953년, 조반니 아넬리가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1955년에는 그의 동생 움베르토 아넬리(Umberto Agnelli)가 유벤투스의 회장이 되었다.
이때 유벤투스는 또 다른 황금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1958년, 유벤투스의 역사적인 순간
유벤투스는 오마르 시보리(Omar Sivori)와 존 찰스(John Charles)의 영입으로 더욱 강력한 전력을 갖췄다.
이들의 활약 속에 1958년, 유벤투스는 또 한 번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이 우승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바로 통산 10번째 리그 우승을 기록하며, 유벤투스 유니폼에 첫 번째 별을 달게 된 것이다.

1960년대, 또 한 번의 성공
유벤투스는 1960년대에도 세 차례의 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1967년, 당시 회장이었던 비토레 카텔라(Vittore Catella)의 지도 아래 또 한 번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1970년대, 새로운 시대의 시작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유벤투스의 역사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팀의 전설이었던 잔피에로 보니페르티(Giampiero Boniperti)가 은퇴했지만,
그는 단순히 축구화를 벗은 것이 아니었다.

1971년 7월 13일, 보니페르티는 유벤투스의 새로운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 순간부터, 유벤투스를 막을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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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페르티 시대 - 희망과 비극이 교차한 유럽 무대

보니페르티 시대는 연속 우승(1971-72, 1972-73)으로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유벤투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의 시작이었으며,

- 9개의 스쿠데토(리그 우승) 트로피
- 1977년 UEFA컵(유벤투스의 첫 번째 유럽 대회 우승)
- 1984년 컵 위너스컵
- 챔피언스리그 우승
을 차지하며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의 성공은 1985년 5월 29일 브뤼셀에서 발생한 헤이젤 참사로 빛이 바랬다.
경기 시작 전,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고 39명의 무고한 희생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순간부터, 축구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혼란을 막기 위해 두 팀은 경기를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유벤투스가 우승컵을 차지했다.
그러나 기쁨 없는 승리였다.
이 승리로 인해 유벤투스는 겨울에 도쿄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탈컵 결승에 출전할 자격을 얻었고,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를 승부차기로 꺾으며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트라파토니 시대 - 유벤투스의 전성기
보니페르티 회장 아래에서, 비츠팔렉과 카를로 파롤라는 강력한 팀을 만들었지만,
1976년,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며 본격적인 유벤투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트라파토니는 조프, 시레아, 타르델리, 카브리니, 카우시오, 로시, 젠틸레, 푸리노, 아나스타시, 베테가 등
유망한 이탈리아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구축하며 절대 강자로 만들었다.

1980년대부터 보니페르티는 외국인 선수 영입에도 적극 나섰고,
그 첫 번째 사례가 아일랜드 출신의 영리한 미드필더, 리암 브래디였다.
그는 유벤투스의 경기 운영을 조율하며, 결정적인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82년 5월 16일, 카탄차로전에서 페널티킥으로 팀의 20번째 스쿠데토를 확정지으며
유벤투스 유니폼에 두 번째 별을 달게 했다.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과 유벤투스
불과 두 달 후인 7월 11일, 이탈리아는 스페인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 국민이 환희에 빠졌다.
그런데 그 대표팀은 트라파토니의 유벤투스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조프, 젠틸레, 카브리니, 시레아, 타르델리, 로시 등 유벤투스 선수들이 핵심을 이루었고,
특히 로시는 7경기에서 6골을 넣으며 득점왕과 함께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이는 리베라 이후 두 번째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이탈리아 선수였다.)

 

 

플라티니 시대 – 유벤투스의 황금기
월드컵 이후, 이탈리아 리그의 외국인 선수 출전 제한이 2명으로 늘어나면서,
유벤투스는 폴란드의 지비 보니에크와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를 영입했다.

특히 플라티니는 유벤투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우아한 움직임, 정확한 패스, 뛰어난 골 결정력을 갖춘 그는,
50야드 밖에서도 동료의 발끝에 공을 올려놓을 수 있는 천재적인 플레이메이커였다.

그는 **3년 연속 유럽 최고의 선수(발롱도르 & 골든 부트 수상)**로 군림하며,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Le Roi(왕)"**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5년 도쿄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탈컵 결승에서, 플라티니는 결승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유벤투스를 세계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또한,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 중 하나로 평가받는 득점이 VAR 없이 취소되는 불운도 겪었다.

이 시즌, 유벤투스는 보니페르티 시대의 마지막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플라티니는 한 시즌 더 뛰고 은퇴한 후, 감독과 행정가로 변신하여
2007년 UEFA 회장에 오르며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보니페르티 시대의 끝과 슬픈 이별
플라티니의 은퇴와 함께, 유벤투스는 새로운 세대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팀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1990년 UEFA컵-코파 이탈리아 더블을 제외하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유벤투스를 이끌던 디노 조프 감독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팀 동료였던 가에타노 시레아와 함께 팀을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1989년 9월 3일,
시레아는 폴란드에서 UEFA컵 상대팀을 분석하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유벤투스 팬들에게 있어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역사가 아직도 반 남았다.

다음 편에 이어서...

 

 

 

 

 

 

 

 

- 참고

https://www.juventus.com/en/club/history/#juveonthetopofth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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