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 팀 알아보기 2편의 2편 !
푸른 유니폼이 매력적인 첼시 FC에 대해서 알아보자 !!
1편 링크
[EPL] 첼시 FC에 대해서 알아보면?
EPL 팀 알아보기 2편푸른 유니폼이 매력적인 첼시 FC에 대해서 알아보자 !! 1. 일반 정보- 일반 정보주소 Stamford Bridge Fulham Road London SW6 1HS 클럽 닉네임: 더 블루스 (The Blues) 창단: 1905년 스
devhooney.tistory.com
역사를 이어서 알아보자
2. 구단역사 이어서...
CHAPTER 2: Aiming for the stars with stars
꿈의 구장, 스탬포드 브리지
'짓기만 하면 그들이 온다(“Build and they will come”)'라는 유명한 대사가 영화 *필드 오브 드림스*에서 등장하는데, 스탬포드 브리지는 정말 꿈의 구장이라 할 만하다. 스포츠의 본질은 영광을 향한 도전과 그 과정에서의 위험 요소에 있다. 그런 점에서 첼시가 초창기에 스탬포드 브리지를 가득 채우기 위해 세운 전략은 명확했다. 관중들은 수비수가 아니라 골과 스트라이커를 원한다는 것이다.
초창기 첼시의 별명인 ‘펜셔너스(Pensioners)’ 시절, 클럽의 첫 번째 슈퍼스타였던 ‘개틀링 건(Gatling Gun)’ 조지 힐스던이 오랫동안 이스트 스탠드 꼭대기를 장식한 풍향계의 모델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1906년 9월 글로솝과의 데뷔전에서 무려 5골을 터뜨리며 9-2 대승을 이끌었고, 그의 폭발적인 28골은 클럽을 첫 번째 승격으로 이끌었다.
힐스던은 세 시즌 연속 20골 이상을 기록했지만, 팀 전체의 경기력은 그의 활약을 뒷받침하지 못했고, 리그 11위가 최고 성적일 정도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후 그는 활기 넘치는 웨스트 런던에서 다양한 유혹에 휘말렸고, 점차 빛을 잃었다.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찬사와 관중들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난롯가에서 손주들에게 들려줄 영광스러운 이야기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이후 30년 동안 첼시에서 반복되는 일이었다.
부와 화려함으로 떠오른 첼시
첼시 FC는 인기 많고 야망 넘치는, 축구계에 remarkable한 존재였지만, 1908년 *웍솝 리포터(Worksop Reporter)* 신문은 많은 사람들의 시각을 대변하며 이렇게 빈정거렸다. "첼시는 단순히 무한한 부(wealth)로 선두에 올라선 대단한 클럽이다."
‘쇼비즈(Showbiz) 첼시’가 진지한 스포츠 정신이 부족하고, 축구의 성공보다는 엔터테인먼트를 목적으로 하는 클럽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돈 데이비스(Don Davies)* 같은 유명 축구 기자들은 브리지를 찾는 팬들이 잉글랜드 축구에서 ‘가장 너그러운’ 관중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분위기가 점점 굳어져 갔다.
1920년대 잉글랜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이었던 센터포워드 **앤디 윌슨(Andy Wilson)**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그는 미들즈브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첼시의 관심을 받았고, 결국 1923년 **6,000파운드**라는 잉글랜드 축구 거의 최고 이적료로 ‘펜셔너스(Pensioners)’에 합류했다.
그는 이후 8년 동안 첼시에서 뛰었고, 그중 상당 기간 주장 역할을 맡았다. 첼시를 사랑하게 된 그는 1973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탠드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1960년대 중반,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내 시절에는 예술적인 축구를 했지. 하지만 결과가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어. 지금 같은 시대에는 절대 용납되지 않을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트롤리버스를 세워놓고 수비하는’(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의미) 전술 따윈 없었다.
윌슨은 한 번은 경기 전에 피우던 담배를 받는 장면이 사진에 찍히기도 했지만, 그는 뛰어난 공격수였다. 그러나 그가 활약하던 런던의 첼시는 클럽 역사상 가장 긴 시간 동안 2부 리그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시의 규모와 위상은 실력만 있다면 누구든 스타가 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 주었다.
2부 리그에서도 빛났던 첼시의 명성
첼시는 2부 리그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국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하며 높은 인기를 유지했다. 클럽의 높은 위상 덕분에 1928년 등번호 유니폼 테스트 같은 FA의 혁신적인 시도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새로운 오프사이드 룰 실험도 맡게 되었다.
1925/26 시즌에 오프사이드 규정이 변경되었을 때, 앤디 윌슨(Andy Wilson)과 그의 동료들은 영리한 플레이를 펼치며 첼시 역사상 세 번째로 긴 시즌 무패 행진(14경기 연속 무패)을 기록했다.
포트 베일 원정에서 6-0 대승을 거둔 후, 데일리 메일(Daily Mail)은 이를 ‘전술의 승리’라고 극찬했다.
“이번 공격 전술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는데, [밥] 턴불과 양쪽 윙어가 전방에 깊숙이 자리 잡고, [인사이드 포워드] 윌슨과 [앨버트] 테인이 뒤에서 주로 공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 팀들도 첼시의 오프사이드 전략을 간파했고, 결국 첼시는 다시 한 번 스스로 발목을 잡는 팀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강등권 팀들에게 중요한 승점을 내주며, 승격 경쟁에서 낙오했고, 승격 열차는 떠났지만 ‘펜셔너스(Pensioners)’는 플랫폼에 남아 있었다.
26년간 팀을 이끈 ‘스핑크스’
당시 첼시를 이끌던 데이비드 칼더헤드(David Calderhead) 감독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스핑크스(The Sphinx)’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말수가 적은 인물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감독직을 맡고 있었고, 그의 26년간의 재임 기간(1933년 퇴임)은 오늘날까지도 클럽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에 대해선 이런 말이 있었다.
“칼더헤드는 두 가지 언어(스코틀랜드어와 영어) 모두에서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구단 수뇌부의 개입을 묵인했다는 평가도 많았다. 선수 선발 과정에서 이사진의 개입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의 방임적 태도(laissez-faire)는 더욱 심각한 상황을 만들었다. 경기 중 골키퍼 벤 하워드 베이커(Ben Howard Baker)가 수비진의 상황과 상관없이 골문 주변에서 공을 튕기며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이는 일도 흔했다. 더 황당한 점은, 감독이나 1군 코치가 아닌 구단 이사진 중 한 명이 확성기를 들고 피치 옆에서 선수들에게 전술을 지시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첼시는 이렇게 엉뚱한 방식으로도 화제를 모으며, 화려하지만 허술한 클럽이라는 이미지를 굳혀갔다.
꾸준한 성과를 낸 칼더헤드의 첼시
럭셔리 크루즈선이 정상적으로 항해하고 있을 때는 굳이 선장을 바꿀 필요가 없듯이, **칼더헤드(Calderhead)**는 첼시를 안정적으로 이끌며 몇 가지 중요한 성과를 달성했다.
그가 감독직을 맡은 첫 시즌, **런던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으며, 1912년에는 **1부 리그 승격**을 이루어냈다. 이후 오랫동안 1부 리그에서 활약했고, **1919/20 시즌에는 3위**를 차지하며 당시까지 런던 클럽 역사상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당시 참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컵대회인 **FA컵**에서도 그는 몇 차례 인상적인 성과를 거뒀다.
- **1910/11 시즌**, 창단 6년 만에 FA컵 **4강**에 진출
- **1914/15 시즌**, **‘카키 결승(Khaki Final)’**으로 불리는 전시기 FA컵 결승 진출 (풋볼 리그에서 세 번째로 어린 클럽으로 결승에 오른 기록)
- **1919/20 시즌, 1931/32 시즌**에도 **FA컵 준결승** 진출
칼더헤드는 화려한 트로피를 들어 올리진 못했지만, 꾸준히 팀을 발전시키며 첼시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머니백스(Moneybags)’ 첼시
경기장 밖에서 칼더헤드의 경영 방식은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1907/08 시즌부터 1914/15 시즌까지 매 시즌 흑자를 기록했으며**, 특히 **1907/08 시즌의 매출 £22,826**은 당시 어떤 축구 클럽보다도 높은 금액이었다.
**스탬포드 브릿지(Stamford Bridge)**에서 **1908년 첫 번째 커뮤니티 실드(Charity Shield) 경기**를 개최한 것도 수익 증가에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1912/13 시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제 경기가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열리면서 수익이 더욱 증가해 **£26,545**로 또 한 번 기록을 경신했다.
**1920년까지** 수많은 경기장 개선 공사를 거친 후, 스탬포드 브릿지는 **FA컵 결승전 개최지**로 선정되었으며, 이후 총 **세 차례(1920년 포함) FA컵 결승전을 유치**하게 되었다.
이처럼 첼시는 경기력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선구적인 클럽이었으며, 그로 인해 ‘**머니백스(Moneybags) 첼시**’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클럽의 주주들은 이익의 5%를 배당금으로 받았지만, 지역 자선단체에도 상당한 기부가 이루어졌다. 1912년 4월, 타이타닉 호의 충격적인 침몰 이후 풋볼 리그가 피해자 지원 기금을 조성했을 때, 첼시가 기부한 500파운드는 단일 구단으로서는 가장 큰 금액이었다. 아직 역사가 짧은 클럽이었지만, 사회적 책임 의식은 강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축구 리그가 지역 단위로 운영되면서 수익이 크게 줄었음에도, 첼시는 풋볼 리그의 어려운 구단들을 돕기 위한 기금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반면, 같은 런던에 위치한 아스널은 이 기금을 자주 신청했지만, 대부분이 다른 구단들과의 형평성 문제로 거절되었다. 첼시는 끝까지 이를 신청하지 않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립을 유지했다.
첼시는 또한 1차 세계대전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런던 팀에 지불해야 할 1,500파운드 이상의 빚을 갚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펜셔너스는 풋볼 리그에 지속적으로 채무 상환을 상기시켰지만, 언젠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차분히 기다렸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른 길을 가려는 첼시의 태도가 다시 한번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리고 1931년 풋볼 리그 연례 총회에서, 첼시의 공동체 의식이 다시 빛을 발했다. 당시 첼시의 회장이었던 클로드 커비는 작은 구단들의 입장 수익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 방송을 금지해야 한다는 안건을 제안했고, 이는 통과되었다. 첼시는 1부 리그에서 가장 화려하고 인기 있는 팀 중 하나로서 중계가 허용될 경우 누구보다도 큰 재정적 이득을 볼 수 있었지만, 다른 구단의 수익이 줄어드는 것은 전체 풋볼 리그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다.
첼시의 ‘머니백(moneybags)’은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돌고 도는 엄청난 관중 수익으로 채워졌다. 영국의 인구는 1831년 1,400만 명에서 1901년 3,25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19세기 중반부터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고 근무 시간이 단축되면서 여가 시간이 늘어났다.
새롭게 형성된 노동자 계층의 축구 팬들은 경기장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의 가처분 소득도 함께 유입되었다. 여행사 토마스 쿡은 ‘스페셜 풋볼 트립(Special Football Trips)’을 운영하며 저렴한 기차 요금을 제공해 원정 경기를 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런던에서 탄생할 새로운 축구 클럽이 이러한 경제적 기회를 잡을 것이라는 사실을 프레드 파커, 거스 미어스 등 창립자들은 정확히 예측했다.
기차, 지하철, 버스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스탬퍼드 브리지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첼시가 2부 리그에서 승격을 노리던 두 번째 시즌에는 평균 관중이 무려 30,850명에 달했다.
이는 런던에서 대형 클럽을 창설하겠다는 프레드 파커의 비전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결과였다. 이전까지 평균 관중 3만 명을 넘어선 구단은 뉴캐슬 유나이티드밖에 없었으며, 1909년 12월 27일 뉴캐슬이 방문했을 때 1부 리그 최다 관중 기록인 66,000명이 경기를 지켜봤다. 1913/14 시즌에는 평균 37,970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같은 시기 아스널의 평균 관중보다 거의 세 배나 많았다.
1907/08 시즌부터 1929/30 시즌까지 첼시는 8시즌 동안 영국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한 클럽이었으며, 1929/30 시즌에는 전 세계적으로도 처음으로 평균 관중 40,000명을 넘긴 팀(42,860명)이 되었다. 1930년대 내내 여전히 최고의 흥행력을 자랑하던 첼시는, 마지막으로 관중 동원 1위를 차지한 1954/55 시즌까지 꾸준히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무대와 스타들 사이에서
스탬퍼드 브리지를 찾는 즐거움 중 하나는 그곳이 ‘볼 만한 장소’라는 명성이었다. 예술가, 배우, 왕족이 마차꾼, 노점상, 바텐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관중석을 채웠다.
20세기 초반, 가장 유명한 유명인은 왕족이었다. 그리고 첼시는 이러한 사회적 연결 덕분에 스타덤의 일부를 누릴 수 있었다. 훗날 조지 6세가 될 왕자는 펜셔너스의 팬이었으며, 왕실이 스탬퍼드 브리지를 방문한 것이 1907/08 시즌을 앞두고 유니폼 색상을 밝은 ‘이튼 블루’에서 ‘로열 블루’로 변경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지 6세는 왕위에 오른 후, 1945년 전시 리그 사우스컵 결승전 첼시와 밀월의 경기(첼시 2-0 승)를 관람하기 위해 딸이자 후에 여왕이 될 엘리자베스를 첫 클럽 경기로 데려가기도 했다.
첼시가 버킹엄 궁전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920년 2월, FA컵 레스터전에서 경기를 맡았던 심판 A. 워드에게 첼시 회장 클로드 커비가 감사 편지를 보냈다. 마치 국왕의 대변인처럼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전했다.
> "폐하께서는 경기 후 직접 심판님을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심판실로 향하는 통로에 인파가 너무 몰려 전갈을 전할 수 없었고, 국왕께서는 부득이하게 경기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국왕께서는 심판님께서 경기를 훌륭하게 진행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이라면 그런 역할을 맡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첼시는 늘 이야기의 중심이었고, 때로는 유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뮤직홀 공연에서, 윌 헤이의 영화에서, 그리고 1935년작 클래식 스릴러 **《39계단》**에서도 언급되었다. 1906년 4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67,000명의 기록적인 관중을 동원한 지 나흘 후, 스파르타 로테르담과의 친선경기에서는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이 경기에서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조지 로비와 프레드 라이트가 첼시의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로비는 경기 초반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날렸고, 첼시는 0-2로 패배했다. 아마도 이 순간이 ‘첼시 놀림거리’의 첫 사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마지막이 아니었다.
첼시는 때때로 경기 성적보다 상업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듯 보였다. 1928~32년에는 스탬퍼드 브리지 스피드웨이 팀이, 1933~68년에는 **그레이하운드 레이싱 협회(GRA)**가, 그리고 1948년에는 난쟁이 자동차 레이싱이 경기장을 사용했다. 한때 여름 동안 경기장을 빌려 사용했던 **런던 육상 클럽**도 1933년 철수했다.
그중에서도 GRA의 자회사인 **스탬퍼드 브리지 그레이하운드팀**이 클럽 운영에 깊이 개입했다. 1935년, 런던 교통위원회가 풀럼 브로드웨이 지하철역과 경기장을 직접 연결하는 보도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이 제안을 거절한 것은 첼시가 아니라 개 경주 팀이었다.
이런 상황은 마치 영화 **《스파이널 탭》** 속 유명한 빌보드를 떠올리게 했다. 한물간 록밴드가 놀이공원에서 공연할 때, 기획자가 실수로 ‘퍼핏 쇼(인형극) 이후 공연’이라고 써놓는 장면이 있다.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밴드 이름 먼저, 퍼핏 쇼는 나중’이라고!"
첼시는 이제 자기가 직접 운영하는 경기장 앞에서조차도 주인공이 아닌, ‘부록’처럼 여겨지는 신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위대한 일관성 없는 팀
첼시가 자주 언급된 이유는 잘 자금을 마련한 야망과 대중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50년간 지속된 성공 부재 때문이었다. 또는 1913년 한 신문에서 표현한 대로, ‘리그 전체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불규칙적인 팀으로 여겨졌다.’ 영국 스포츠에서는 영광 없는 실패를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펜셔너스는 1910년에 강등된 후, 칼더헤드 감독이 3월과 4월에 여섯 명의 새로운 선수를 영입해 ‘안전을 위한 구매’를 시도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이 반발의 유산 중 하나는 FA가 첫 번째 이적 마감일을 도입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돈많은 클럽’이라는 별명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유일한 예외가 1974년부터 1995년까지의 기간이었다.
이 표현은 첼시가 처음부터 관중을 끌어들이는 재능에 투자했기 때문에 붙여졌다. 클럽 역사에서 첫 50년 동안, 우승할 수 있는 주요한 트로피는 두 개에 불과했으며, 당시와 지금이나 축구 선수들은 성공적인 클럽에서 뛰고자 했다. 우승은 보너스, 메달, 수익성 있는 광고 계약을 의미했다.
펜셔너스는 성공적인 경력의 이력을 제공할 수 없었지만, 더 부드러운 유인책에서는 무적이었다: 엄청난 팬층, 항상 신문에 등장, 훌륭한 위치, 그리고 선수들을 왕족처럼 대우했다. 예를 들어, 최고의 의료 서비스(1948년 복지 국가 이전), 집과 차에 대한 지원, 여름 투어를 위한 풍성한 비공식적인 용돈 등이 그것이었다.
항상 새로운 스타들이 펜셔너스의 별자리로 합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05년 창립 이후, 첼시 축구 클럽은 연합 축구의 화려한 무대 역할을 해왔으며,’ 1955년, 오래된 축구 기자 돈 데이비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주요 기능은 가능한 한 많은 현역 축구 스타들을 런던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
‘지난 50년 동안 첼시의 최전방을 이끌었던 센터 포워드들을 보라. 대부분이 국제 선수들인 그들은 힐스돈, 첫 경기에서 5골을 넣은 선수; [밥] 휘팅엄, 골문을 뚫은 선수; [비비안 "잭"] 우드워드, 66회의 [영국] 대표 경기 경험을 가진 선수이자 아마추어 축구계의 클로드 뒤발; [잭] 콕, 완벽한 체격을 지닌 선수; 윌슨, 은밀한 패스를 마스터한 선수; 그리고 [휴] 갤러처, ‘형제 스코틀랜드인’이며 그 중 가장 섬세한 기술자로 4번의 경기에서 5골을 넣은 선수였다. 그 외에도 [조] 페인 – ‘10골 페인’ – 그리고 [톰미] 로튼, [로이] 벤틀리 등 최근의 고귀한 인물들.’
‘또한 [알렉] 잭슨, 최초의 로머; [톰미] 워커, 하트스의 선수; [빅] 우드리, 가장 잘생긴 골키퍼; 그리고 [렌] 골든과 [조니] 해리스, 최고의 충성심을 가진 전설적인 선수들이 있었다. 이처럼 펜셔너스는 그들의 팬들에게 부유한 오락을 제공해 왔다. 결코 부지런함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의 신과 같은 부주의함’으로 말이다.’
오늘날의 리얼리티 TV 쇼 **‘메이드 인 첼시’**와 비슷하게, 최신 헤드라인을 장식한 선수가 등장했다면 그 뒤에는 이야기거리가 필요했다. 런던의 화려한 웨스트 엔드의 나이트클럽과 연관이 있으면 금세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곤 했다.
눈부신 개성은 관중들을 흥분시켰지만, 축구는 팀 스포츠이고 그 ‘신과 같은 부주의함’은 종종 칼더헤드 감독의 선수들이 너무도 조화를 이루지 못해 우승을 위한 경쟁에서 떨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1930년, 새로 승격된 첼시는 갤러처, 잭슨, 윌슨 등 9명의 국제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스타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칼더헤드 감독 하에서, 클럽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을 맡았던 그의 치하에서, 경기장은 팀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결국, 팬들의 열정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돈가방 속의 은이 아니라, 라이벌을 이기거나 트로피를 거머쥔 순간이었다 – 설령 그들이 가장 관대하고 자애로운 팬층을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1932/33 시즌이 끝날 때, 칼더헤드는 은퇴했고, 2년 내에 그와 옛 이사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930년대 중반은 첼시 FC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었으며, 새로운 에너지가 곧 발산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CHAPTER 3 - Sowing the seeds of success
‘기억해야 할 순간, 5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온 그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다. 시계의 분침이 5시 5분을 가리켰을 때, 카디프에서 포츠머스가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순간 첼시는 챔피언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내내 – 때로는 냉소적이고, 자주 재치 있는 –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50,000명의 관중들이 일어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기뻐했다. 자, 첼시는 어떻게 해냈을까? 주로 팀 정신, 체력, 그리고 직선적인 플레이 덕분이다. 이는 펜셔너스 시절의 그 꿈꾸던 첼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 **The Sunday Times** (1955년 4월 24일)
1955년 4월 23일 토요일은 50년 간의 희망과 기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첼시는 다시 한 번 영국 최고의 지지 클럽으로서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에릭 ‘토끼’ 파슨스는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고, 피터 실렛의 페널티로 3-0이 되었으며, 관중들은 사방에서 필드로 몰려들었다. 기다림은 끝났고, 이제 런던의 비판자들에게 음악홀에서 떠들던 농담들이 되돌려졌다.
‘수십 년을 기다린 눈물에 젖은 팬들부터, 가장 어린 첼시 팬까지, 선수들과 그들을 지탱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냈다.’라고 첼시의 위대한 기록자 앨버트 세웰이 그 순간에 대해 썼다.
관중들로 인해 필드가 보이지 않자, 급히 동쪽 스탠드의 상단에 마이크가 설치되었다. 조 미어스 회장이 먼저 그들의 변함없는 지원에 감사의 말을 전한 후, 감격한 테드 드레이크 감독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이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감독은 말했다. ‘모든 선수들과, 모든 스태프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사무실, 훈련, 경기 모두가 하나로 뭉쳐서 CHELSEA다!’
최고 득점자인 로이 벤틀리가 이끄는 선수들은 우승 보너스로 20파운드나 맞춤 양복을 제안받았지만 (많은 이들이 후자를 선택했다), 그 영광은 금액으로 측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영광을 가져온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1952년 6월, 전 아스널과 잉글랜드의 스트라이커였던 테드 드레이크는 스탬포드 브릿지의 새로운 사무실에 앉아, 첼시를 사랑받는, 성과가 부족한 팀에서 영국 챔피언으로 만들기까지 3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고했다. 1954/55 시즌 시작을 앞두고, 50년 후의 ‘스페셜 원’처럼 그는 이번 시즌이 그 시즌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드레이크가 스탬포드 브릿지에 도착하다**
그가 레딩을 3부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고 온 후, 드레이크는 "그는 축구를 다루던 방식처럼, 강하고 남성적이며, 조금 직설적이고 무엇보다도 열정적으로 감독직에 접근한다"고 평가받았다.
감독 자신은, "대부분의 1부 리그 팀들 간에는 큰 차이가 없다. 성공을 거두는 팀은 열심히 일하고, 경기가 어려울 때 작은 추가 노력이 필요할 때 계속 싸워나가는 팀이다. 오직 높은 팀 정신만이 이런 돌파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정말 유용한 팀의 기초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이 팀은 두 번이나 강등을 가까스로 피했으며(한 번은 골 평균 차이로 간신히 피했다) 있었다.
드레이크는 그가 물려받은 팀을 평가하면서, 특히 로이 벤틀리와 수비수 조니 해리스를 좋아했다. 그는 올바른 사고방식과 재능을 가진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넓은 범위로 선수들을 구했다. 드레이크는 브라이튼의 거친 수비수 스탠 윌렘스와 인사이드 포워드 조니 맥니콜을 3부 리그에서 영입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으며, 크루에서 18살의 윙어 프랭크 블런스톤을 영입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그는 이적 협상을 직접 진행하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또한 그는 피터 실렛을 영입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와 사우샘프턴에서 함께 뛰었기 때문이며, 이 수비수를 가장 중요한 영입 중 하나로 평가했다.
새로운 감독은 전임자의 경험 많은 조수 스튜어트 데이비슨(과거 스코틀랜드 국가대표였지만 지금은 은퇴할 나이가 된)과 유명한 개인 비서 에스더(1940년부터 첼시에서 일한 '메트칼프 부인')를 그대로 두었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클럽의 대중 이미지도 바꾸어야 했다.
드레이크는 스탬포드 브릿지 관중들로부터 더 많은 충성심을 이끌어내기를 원했다. 첼시 팬들은 축구에서 가장 국제적이고 여유로운 팬들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첼시 팬들이 방문 팀들에게 "더 부드러운 접근"을 하길 원하지 않았고, 그들이 "첼시를 살아 숨 쉬듯" 지지하길 원했다. 드레이크가 처음 몇 달 동안 이끈 팀에서, 수비수 스탠 윌렘스는 자신의 팬들에게 부상을 당한 울버햄튼의 윙어를 거칠게 태클한 이유로 자국 팬들에게 야유를 받았다.
그는 아마도 이런 농담들을 듣고 괴로웠을 것이다: "축구 팬이 회복 중인 친구에게: '최근 첼시 봤어?' 친구: '아니 – 그들은 내가 아플 때 나를 보러 오지 않았어.'" 그리고 그는 첼시가 컵을 이겼을 때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플라크를 올리던 첼시 팬인 샤크 팜 카페 주인의 사진이나, 1930년대의 유명한 유머 '첼시가 컵을 이기고 난 날'을 들을 때마다 싫었을 것이다. 웃음은 이제 끝내야 했다.
"그 자랑스러운 오래된 연금생활자, 첼시 프로그램 표지 중앙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 작은 둥근 모자 쓴 노인이 기억나시나요?" 1952년 8월 **Daily Mirror**는 이렇게 썼다. "그 자랑스러운 군인은 이제 더 이상 스탬포드 브릿지의 전투에서 싸우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그 라인에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임시로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클럽의 블레이저 엠블럼, 밝은 파란색 바탕에 실버로 엮인 'CFC' 글자가 새겨진 방패였다. 시간이 지나면 클럽은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이 방패를 대신할 것이다."
드레이크는 페르시를 은퇴시키기로 단호히 결단했다. "우리는 '펜셔너스'라는 별명을 결코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인정했다. "그 뜻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것을 버리고 싶다. '그래, 그들은 펜셔너스처럼 경기한다'는 농담은 이제 식상하다." 그 후, 첼시 팬들을 괴롭히는 코미디언들에게도 불만을 품게 만든 이름, 첼시는 '더 블루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은 여전히 "친절한 첼시"가 승자로 변하는 것보다 더 빨리 점박이 무늬가 바뀔 것이라며 의심했다. 하지만 사실, 드레이크의 1955년 성공의 뿌리는 20년 전, 클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와 혁신에 있었다.
**청춘의 날이 오다**
1935/36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주요 인물들이 연달아 사망하면서 클럽은 큰 충격을 받았다. 1907년부터 비서직을 맡아온 버트 팔머, 창립 이사인 JT 미어스와 클로드 커비(클럽의 유일한 의장), 그리고 또 다른 이사였던 찰스 프랫 시니어(잠시 커비의 후임을 맡기도 했)가 모두 5개월 사이에 사망했다. 클럽은 또한 12,000파운드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그토록 경험 많고 잘 연결된 이사회는 새로운 인물들로 대체되었고, 이들은 '펜셔너스'를 그들의 행복한 잠에서 깨우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다음 세대의 의사결정자들은 조 미어스, 그의 형 레슬리, 클로드 커비의 제자인 잭 버드, 6피트 8인치 키를 자랑하는 수구 올림픽 선수였던 앤티크 딜러 '빌' 프랫, 하울러이자 엔터테인먼트 프로모터인 헨리 '잭' 보이어였으며, 그는 또한 미어스의 사촌이었다. 모두 30대였다.
이사회의 유일한 나이가 많은 멤버였던 찰스 크리스프 대령은 여름 파티를 위해 자신의 대규모 서식지인 서식스주 루이스에서 선수를 초대해 그들이 긴장을 풀 수 있도록 했으며, 1940년에는 조 미어스가 의장직을 이어받아 첼시와 축구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933년 데이비드 칼더헤드의 후임으로 비서-감독직을 맡은 레슬리 나이트는 다가오는 혁명의 좋은 지휘자처럼 보였다. 그는 재능을 찾기 위해 먼 곳까지 눈을 돌렸고, 특히 아일랜드에서 센터 포워드 조 밴브릭과 '10골' 조 페인과 같은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나이트는 또한 1938년에 첼시 최초의 흑인 선수를 영입했는데, 바로 10대 포워드 프레드 핸리였다. 그는 "어떤 클럽은 인종 차별을 두지만, 첼시는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재능이 있다면, 선수가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만 있다면, 첼시는 어떤 형태의 편견에도 반대할 것이다"고 선언했다.
펜셔너스는 1935/36 시즌 8위로 마무리했으며, 이는 런던 팀의 역사에서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이었다. 공격적인 축구 스타일은 82,905명의 기록적인 관중을 끌어들였고, 이는 같은 시즌 아스널과의 1-1 무승부에서 기록된 숫자였다. 나이트가 떠날 즈음, 클럽의 재정은 30,000파운드가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미스터리 팀'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어느 날은 영감을 받은 선수처럼 경기를 펼치며 가장 강한 상대를 무너뜨릴 때가 있었고,' 나이트는 나중에 회상했다. '그다음 날은 마을 팀처럼 경기를 하며 패스를 놓치고, 거친 킥을 하면서 어쩌다 자책골을 넣기도 했다.'
1939년 그의 후임으로는 대학교 교육을 받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전 인사이드 포워드인 윌리 비렐이 임명되었고, 진정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비렐의 큰 아이디어는 전통적인 이적료의 순환을 끝내는 것이었다: 첼시 주니어팀. 그는 이 팀을 축구 교육을 위한 종합적인 시스템으로 설계했으며, 선수들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이 계획을 방해했다.
비렐의 제안대로 첼시 주니어팀은 1940년 QPR과의 친선경기를 통해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본격적인 시작은 1947년에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역화된 축구 환경 속에서 그는 펜셔너스를 연이어 웸블리에서 열린 풋볼 리그 남부 컵 결승에 진출시키는 성과를 올렸다(첼시는 1945년에 밀월을 2-0으로 이기며 여전히 우승팀이었다).
그의 놀라운 유산은 하로우 로드에 있는 유스 클럽인 튜더 로즈와의 연결이었다. 첼시의 주요 선수들은 매주 세 번씩 이 클럽의 젊은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했고, 가장 뛰어난 선수들은 튜더 로즈 팀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 시스템에서 첫 번째로 1군에 합류한 선수는 요크셔 출신의 스트라이커 바비 스미스였으며, 그는 1950년 9월 4일 17세의 나이로 첫 경기를 치렀고, 1954/55 시즌 타이틀을 차지한 팀에서 4번 출전했다. 또 다른 주니어 선수인 윙어 피터 브라브룩도 그 팀의 일원이었고, 1950년대 후반에는 이 생산 라인이 멈추지 않게 되었다.
같은 시기, 청춘을 강조하는 방향에 맞춰, 펜셔너스의 고별 전까지 6년 전, 1946년 8월 첫 포스트 전쟁 첼시 매치데이 프로그램의 만화 속에서는 ‘빌리 블루’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다. '빌리 블루는 모든 좋은 스포츠맨과 충성스러운 축구 팬을 상징한다'고 '퍼시'는 소개하며 말했다. '그는 그 대군을 대표한다 – 바로 여러분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모두를 하나로 모아 오랫동안 원했던 성공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비록 비렐이 주요 선수들이 잘 어울리도록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의 팀은 결코 13위 이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시는 다시 한 번 축구를 즐기기 위한 '핫'한 장소로 떠오르며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1945년 11월, 공식 참석자 수는 클럽 기록을 깨지 않았지만, 약 100,000명이 러시아팀 다이너모 모스크바와의 친선 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다. 전쟁의 고통과 희생 이후, 국민들은 즐길 거리를 갈망했으며, 그들은 전쟁 중의 소련 동맹국 축구 선수들에게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그 날, 74,496명이 입장료를 지불해 입장했으며, 그 중 일부는 10실링(50펜스) 티켓을 얻기 위해 암표상에게 평균 주급인 5파운드까지 지불했다. 나머지 관중들은 경기장 둘레의 틈을 통해 입장했고, 그 결과 수천 명이 장벽을 넘으며 그레이하운드 트랙을 건넜다.
이시기, 잭 보이어 이사의 그랜빌 극장은 첼시 경기 프로그램에서 광고를 내었고, 그의 쇼비즈니스 연결 덕분에 **The Stage**는 자주 그와 함께한 유명한 별들의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마침내 챔피언이 되다!**
다음 시즌, 드레이크는 마침내 컵을 우승할 수 있는 팀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리그 우승입니다."
어떤 육상 경기처럼, 마지막 10야드는 가장 힘든 구간이다. 그리고 선수들이 뒤쳐져도 괜찮다고 여기는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강력한 추진력과 끈질긴 의지가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블루스는 – 더 이상 펜셔너스가 아니었다 – 그가 요구한 만큼 집요하게 싸웠고, 마지막 32점 중 24점을 획득하여 우승을 확정지었다.
1955년 4월, 그들의 축하 무대는 계획이 아닌, 20년에 걸친 준비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공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비렐의 유산인 첼시 주니어팀은 계속해서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 중에는 비할 데 없는 지미 그리브스도 있었다. 이 선수들은 ‘드레이크의 아기 오리들’로 불렸고, 그들의 이름을 딴 드레이크는 1957년 11월 10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계약의 절반만을 채운 후 떠났다. 축구 전술은 변했고, 그것은 그의 강점이 아니었다. 1962년 9월, 강등 위협이 다가오자 드레이크 시대는 갑자기 끝을 맺었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가장 위대한 축구 경력도 항상 실패로 끝나는 법이다.
이 혁신과 미래 지향적인 시기의 마지막 발자취가 있다. 아쉽게도, 클럽 비서 존 배터스비가 첫 번째 1955/56 유러피언 컵(현재의 챔피언스 리그)을 설정하는 데 열정적으로 도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첼시의 이사회는 ‘일정 혼잡’ 문제를 이유로 축구 리그에 의해 강제로 초대 거부를 당했다. 그들이 그 대담한 미래로 나아갔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역사가 너무 길다...
최대한 요약해서 올려보려고 한다.
끝
- 참고
'스포츠 > EPL' 카테고리의 다른 글
[EPL] 첼시 FC에 대해서 알아보면? (178) | 2025.02.25 |
---|---|
[EPL]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알아보기 (2) (110) | 2025.02.11 |
[EPL]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알아보기 (126) | 2025.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