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Serie A

[Serie A] AS 로마를 알아보자!

devhooney 2025. 5. 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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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티의 팀이었던 AS 로마에 대해서 알아보자 !!

 

 

토티는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현역 시절 세리에 A 통산 250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를 2회, 세리에 A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를 1회씩 수상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유로 2000 준우승과 2006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한편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한 명문 클럽들의 오퍼를 모두 거절하고, 선수 경력 전체를 AS 로마에 바친 원클럽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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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The beginning

1927년 여름, 로마의 스포츠 애호가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며 아소차치오네 스포르티바 로마, 즉 AS 로마가 탄생했다. 이 구단은 로마를 기반으로 한 세 개의 클럽인 포르티투도-프로로마, 풋볼 클럽 디 로마, 알바-아우다체가 합병하면서 만들어졌다.

일 메사제로와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로마판) 같은 당시 주요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이 합의는 1927년 6월 7일 밤, 역사적인 밤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탈로 포스키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는데, 그는 이전 몇 달 동안 세 클럽 사이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주도하며 로마의 스포츠인들을 하나로 모아 북부 팀들을 이길 수 있는 강팀을 만들자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구단은 카피톨리노 늑대를 상징으로, 로마 도시의 색인 노란색과 빨간색을 팀 컬러로 삼았다. 이 색은 로마의 오래된 지역과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사랑받던 색이었다.

그리고 1927년 7월 22일, 포스키는 ‘제1호 결의안(Ordine del Giorno n.1)’에 서명하면서 구단을 스포츠 운영, 재정, 본부의 세 주요 부문으로 나눠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The Coni Cup: Ferraris and Bernardini

포스키의 구상은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1927-28 시즌, 로마는 첫 번째 우승 트로피인 코니 컵(CONI Cup)을 차지했다. 결승전에서 모데나를 꺾고 얻은 우승이었다. 당시 팀의 중심 선수는 이탈리아 국가대표이자 로마 시내 중심부 보르고 피오 출신인 아틸리오 페라리스였다.

페라리스는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 '아주리'와 함께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첫 시즌이 끝난 뒤, 로마 축구의 전설이라 불리는 풀비오 베르나르디니가 팀에 합류했고, 이후 11시즌 동안 팀의 중심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게 된다.

 

 

 

 

 

 

 

 

 

The legendary Campo Testaccio

그 초창기 시절, 캄포 테스타치오는 로마 팬들의 자부심이었다. 이곳은 1929년부터 1940년까지 로마가 훈련을 했던 경기장이기도 하다. 이 전설적인 구장에서 열린 첫 경기와 마지막 경기는 모두 2-1 로마 승리로 끝났는데, 각각 브레시아와 리보르노를 상대로 한 경기였다.

테스타치오로 홈구장을 옮긴 지 한 달 후, 구단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로마와 라치오의 첫 번째 로마 더비가 열린 것이다. 이 두 클럽 간의 라이벌 관계는 빌라 글로리 근처 론디넬라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관중 대부분은 로마 깃발을 흔들고 있었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경기의 승부는 로돌포 볼크의 골로 결정됐다.

1930년대에는 로마와 유벤투스 간의 치열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31년에 열린 한 경기는 특히 주목할 만했는데, 당시 유벤투스는 사상 첫 5연속 스쿠데토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캄포 테스타치오에서 5-0으로 완패했다.

이 경기는 마리오 본나르드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됐고, 이는 축구가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The first Scudetto

구단 창단 15년 만에, 로마는 마침내 첫 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당시 알프레드 셰퍼의 지휘 아래 로마는 매우 강한 전력을 자랑했는데, 수문장 귀도 마세티가 이끄는 탄탄한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을 갖춘 팀이었다. 하지만 그 해 승부를 갈랐던 결정적인 요소는 공격수 아메데오 아마데이가 넣은 18골이었다.

프라스카티 출신인 아마데이는 로마 유스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뒤 아탈란타에서 성장했고, 이후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셰퍼는 그를 센터 포워드 자리에 배치했고, 아마데이는 골로 그 신뢰에 보답했다. 로마의 이 우승은 북부 지역이 아닌 팀이 처음으로 스쿠데토를 차지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Fall and rebirth

첫 번째 성공 이후, 로마는 힘든 시기를 겪게 된다. 다른 어떤 클럽보다도 전쟁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로마는 선수도, 자금도 없이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몇 시즌 동안 부진한 성적이 이어졌고, 결국 1950-51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유일하게 강등을 당했다. 하지만 곧 지포 비아니의 지휘 아래 세리에 A로 복귀했고, 이후 10년 동안의 가장 큰 성과는 1954-55 시즌의 리그 2위였다.

1960년대 초, 로마 팬들은 유럽 대회를 통해 다시 열정을 되찾게 된다. 1960-61 시즌, 로마는 페어스 컵 결승에 오르며 첫 국제 대회 성과를 맛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생질루아즈(0-0, 4-1), 쾰른(2-0, 0-2, 4-1), 히버니언(2-2, 3-3, 6-0)을 차례로 꺾었다.

결승에서는 루이스 카르닐리아 감독이 이끄는 로마가 잉글랜드의 버밍엄 시티와 맞붙었다. 1차전은 영국 원정 경기였고, 페드로 만프레디니의 두 골로 로마가 앞서갔지만, 이후 버밍엄이 두 골을 따라잡으며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2차전은 올림피코 경기장에서 열렸고, 이번에는 로마가 훨씬 수월하게 경기를 풀어나갔다. 상대 자책골과 파울로 페스트린의 추가골로 2-0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 대회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연 페드로 만프레디니였는데, 그는 무려 12골을 넣으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The ‘60s and two Italian cups

1960년대, 로마는 1964년과 1969년 두 차례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을 자랑스럽게 만들었고, 프란시스코 로야코노,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안토니오 안젤릴로, 자코모 로시, 그리고 ‘피키오’ 데 시스티 같은 재능 있는 선수들에게 과감히 투자했다.

1969년 코파 이탈리아 우승 당시에는 알바로 마르키니 회장과 ‘마법사’ 헬레니오 에레라가 팀을 이끌었다. 그 시즌의 주역은 ‘치치오’ 코르도바와 파비오 카펠로였고, 훗날 카펠로는 로마의 감독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즌은 한 가지 비극적인 사건으로 얼룩졌다. 1969년 3월 16일, 줄리아노 타콜라가 라커룸에서 발작을 일으킨 뒤 사망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50년이 지난 뒤, 로마는 SPAL과의 경기에서 특별 유니폼을 착용하며 타콜라를 추모했다.

 

 

 

 

 

 

 

 

The arrival of Liedholm

1970년대에는 가에타노 안살로네가 회장직에 오르면서 닐스 리드홀름 감독을 영입했다. 이 스웨덴 감독은 프란체스코 로카와 아고스티노 디 바르톨로메이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신뢰를 보냈다.

이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고, 로마는 1974-75 시즌에 리그 3위를 차지했다. 안살로네는 또 하나의 탁월한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오늘날까지도 로마의 홈이자 훈련장이 되고 있는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디 트리고리아’ 훈련 센터를 건설한 것이다.

 

 

 

 

 

 

 

 

 

Viola’s Roma

1979년 여름, 디노 비올라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로마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의 리더십 아래 로마는 이탈리아 축구의 정상에 점점 가까워졌다. 취임 첫해, 비올라는 리드홀름이 다시 로마로 돌아온 가운데 토리노를 꺾고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브루노 콘티, 카를로 안첼로티, 그리고 위대한 스트라이커 로베르토 프루초 같은 젊은 선수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0-81 시즌에는 유벤투스와의 역사적인 라이벌전이 다시 불붙었는데, 논란 끝에 유벤투스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로마는 코파 이탈리아 2연패를 달성했다.

바로 이 시기에 뛰어난 미드필더 파울로 로베르토 팔카오가 처음으로 로마 유니폼을 입게 된다.

 

 

 

 

 

 

 

The second Scudetto

로마가 1942년에 맛본 첫 번째 스쿠데토의 영광을 다시 되찾은 것은 1982-83 시즌이었다. 1983년 5월 8일, 제노바에서 로마는 로베르토 프루초의 동점 골 덕분에 두 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리드홀름 감독이 만들어낸 팀은 완벽한 기계와 같았다. 탄크레디, 비에르초보드, 넬라, 말데라와 같은 기둥이 된 수비진, 디 바르톨로메이, 팔카오, 안첼로티, 프로하스카와 같은 뛰어난 미드필드, 그리고 프루초와 브루노 콘티가 이끄는 폭발적인 공격진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우승에 열광했고, 이는 십 년 전 ‘로마 로마 로마’를 작곡한 싱어송라이터 안토넬로 벤디티에게 또 다른 곡 ‘그라지에 로마’를 쓰게 영감을 주었다.

 

 

 

 

 

 

 

 

One step from European Cup glory

스쿠데토 우승 다음 시즌, 로마는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다. 유벤투스는 단 2점 차로 로마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팬들에게 더욱 아픈 기억은 유럽컵 결승에서 잉글랜드 챔피언 리버풀에게 패배한 일이었다.

로마는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홈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승리가 거의 예상되었었다.

리드홀름 감독이 이끄는 팀은 예테보리, CSKA 소피아, 디나모 베를린, 던디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막을 내릴 기세였으나, 리버풀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나섰다. 필 닐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첫 번째 골을 프루초가 동점골로 만회한 후, 경기는 승부차기로 진행되었다.

리버풀은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르의 골라인에서의 기이한 행동 덕분에 승리했다. 이는 로마와 그 팬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고, 많은 이들은 이를 유럽 최고의 팀으로 거듭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로 여겼다.

로마는 1983-84 시즌을 코파 이탈리아에서 베로나를 이기며 마무리했지만, 올림피코에서의 유럽컵 패배는 비올라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Another European final

1984년에 감독으로 취임한 스벤 외르한 에릭손은 1985-86 시즌에 로마가 세 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할 뻔했지만, 시즌 마지막에서 두 번째 경기에서 하위 팀인 레체에게 막히며 우승을 놓쳤다.

로마의 위로는 여섯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이었다. 1980년대 후반은 로마가 또 다른 트로피를 거두지 못했지만, 지우세페 지아니니의 등장과 루디 뵐러의 영입은 로마 팬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1991년, 비올라가 세상을 떠난 해에, 오타비오 비앙키 감독의 지도 아래 로마는 UEFA 컵 결승에 진출했다.

인터 밀란은 첫 번째 경기를 2-0으로 승리했지만,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에서 루지에로 리지텔리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UEFA 컵 우승은 로마의 손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1990-1991 시즌, 로마는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삼프도리아를 이기고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Franco Sensi arrives

피에트로 메차로마와 잠시 공동 회장직을 맡은 후, 프랑코 센시는 클럽의 단독 소유자가 되었다. 새로운 회장인 센시는 로마의 열렬한 팬으로, 지역 출신 감독 카를로 마초네를 임명하고, 아벨 발보와 다니엘 폰세카 같은 큰 이름의 선수들을 영입했다.

팀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마초네의 지도 아래 젊은 프란체스코 토티가 꽃을 피웠다.

한 시즌 동안 카를로스 비앙키와 실험을 거친 후, 센시는 로마를 전술 혁신가로 유명한 감독 즈데넥 젬을 맡겼다. 젬의 지도 아래 로마는 카푸, 빈센트 캔델라, 다미아노 톰마시, 마르코 델베키오와 같은 훌륭한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지역 영웅인 토티는 곧 팀의 주장이 되었다.

 

 

 

 

 

 

 

 

A third Scudetto

1999-00 시즌, 로마 팬들은 더 많은 타이틀과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센시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를 호출하고, 빈첸초 몬텔라와 나카타 히데토시와 같은 최고 수준의 선수들을 영입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팀이 완성된 것은 2000년 여름,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동료 남미 선수들인 발터 사무엘과 에머슨이 합류하면서였다. 로마는 시즌 내내 선두를 지켰고, 18팀 리그에서 가장 많은 75점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영웅들? 바티스투타는 20골을 기록하며, 몬텔라와 토티는 로마 팀의 진정한 스타이자 리더였다.

 

 

 

 

 

Supercoppa success

여름에 로마는 이탈리아 슈퍼컵에서 피오렌티나를 3-0으로 이기고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첫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했다.

카펠로는 로마에서 3시즌 더 지낸 후, 로마의 역사적인 라이벌인 유벤투스로 이적했다. 파르마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린 것으로 유명한 체자레 프란델리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지만, 심각한 개인적인 문제로 사임해야 했고, 그 후에는 전 스트라이커인 루디 뵐러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시즌은 벤치에서의 잦은 변화로 인해 좋지 않았다.

 

 

 

 

 

 

 

 

A glorious eighth Coppa Italia

2005년 여름, 루치아노 스팔레티가 감독으로 부임하며 로마에 새로운 시작을 약속했다. 첫 해에 팀은 세리에 A에서 11연승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며 2006-07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다. 이는 유벤투스와 AC 밀란이 '칼초폴리' 스캔들로 처벌을 받으면서 가능했다.

2006-07 시즌은 이탈리아 슈퍼컵 결승에서 인터 밀란에 3-4로 패하며 최악의 시작을 맞았지만, 시즌은 세리에 A에서 또 다시 2위에 올랐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8강까지 진출했으며,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인터 밀란을 꺾고 영광스러운 8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More cup success for Roma

2007-08 시즌 시작에서 로마는 산 시로에서 인터 밀란을 상대로 수페르코파를 우승하며, 다니엘레 데 로시의 페널티킥 덕분에 승리했다.

리그에서 토티와 그의 동료들은 인터 밀란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네 번째 스쿠데토를 향해 싸웠지만, 결국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로마는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이 대회에서 기록적인 9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2008-09 시즌 시작 전에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프란코 센시 회장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딸 로셀라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장직을 맡았다.

 

 

 

 

 

 

Another European campaign

로마는 프란코 센시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았고, 강력한 기반에도 불구하고 전년도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며 세리에 A에서 7위에 머물렀고,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인터 밀란에 8강에서 탈락했다.

그 해는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짜릿한 모험으로 기억될 만하다. 로마는 아스날과의 8강에서 페널티킥 결승에서 아쉽게 패하며 탈락했다.

2009-10 시즌 초,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감독으로 부임하여 스팔레티를 대신했다. 라니에리는 믿을 수 없는 첫 시즌을 보냈고, 로마는 네 번째 스쿠데토에 가까운 위치에 도달했다.

2011년 2월, 라니에리는 빈첸초 몬텔라로 교체되었고, 그 해 5월, 로마는 시즌을 6위로 마무리했다.

 

 

 

 

 

 

 

An American Roma

2011년 여름은 센시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미국 소유주들, 제임스 팔로타와 토마스 디베네데토가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클럽 역사에서 새로운 야심찬 장을 여는 전환점을 의미했다.

미국 소유 하에, 클럽 내부와 외부에서 즉각적인 변화들이 일어났으며, 그 첫 번째 변화는 루이스 엔리케의 감독 부임이었다.

스페인 출신의 엔리케는 클럽에서 ‘혁신적인’ 축구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쉽게 나오지 않았고, 시즌이 끝난 후 감독이 사임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새로운 로마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고, 2012년 6월 초, 제데넥 제만이 감독직을 맡으며 다시 한 번 팬들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팔로타는 8월 말에 자신이 회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체코 감독의 두 번째 로마에서의 임기는 짧았고, 팀의 성과가 미흡하자 2013년 2월 초에 해임되었다.

아우렐리오 안드레아초리가 잠시 감독직을 맡았지만, 그의 짧은 재임 기간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013년 6월 12일, 루디 가르시아가 로마의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로마 역사상 첫 프랑스인 감독이었다. 가르시아는 선수들과 팬들 사이에서 즉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첫 시즌에 10연승을 기록하며 세리에 A에서 2위로 마무리하고 챔피언스리그 그룹 스테이지 진출을 이끌었다.

가르시아의 두 번째 시즌에도 로마는 2위로 마감하며, 두 번째 연속으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지었다.

2016년 1월, 가르시아는 클럽을 떠났고, 루치아노 스팔레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스팔레티는 클럽의 첫 번째 임기 동안 최근의 은메달을 이끌었던 감독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두 번의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고, 2017년 5월에 떠난 뒤, 바로 전 로마 선수인 에우세비오 디 프란체스코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디 프란체스코는 첫 시즌에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 진출하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2019년 3월에 클럽을 떠났다.

그 후,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임시로 감독을 맡은 뒤, 2019년 여름에는 파울로 폰세카가 로마의 첫 포르투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우크라이나 샤흐타르 도네츠크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거둔 폰세카는 2019-20 세리에 A 시즌이 중단된 상황에서 로마를 5위로 이끌었고, 유로파리그에서 16강에 진출했다.

 

 

 

 

 

 

A New Era Begins

2020년 8월, 클럽의 소유권이 변경되었으며, 프리드킨 그룹이 AS 로마를 인수했다.

미국의 사업가인 단 프리드킨은 클럽의 25대 회장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수도에서 "야심차고 규율 있는 비즈니스 계획"을 실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AS 로마 가족에 합류하게 되어 기쁩니다."라고 말하며, "최근 한 팬이 쓴 것처럼, ‘우리의 상징적인 클럽을 가져가 세계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 중 하나로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일을 할 생각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들의 소유 첫 해 동안, 남자 팀은 유로파리그 준결승에 진출했으며, 이는 1991년 브론디와의 마지막 준결승 진출 이후 30년 만의 성과였다. 그러나 2021년 세리에 A에서 7위로 마감하면서 감독 교체가 이루어졌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제 무리뉴가 클럽의 야심찬 계획을 감독하게 되었다.

한편, 여자 팀은 역사상 첫 번째 트로피인 코파 이탈리아를 들어 올리며, 유벤투스(준결승)와 AC 밀란(결승)에서 승리했다.

 

 

 

 

 

 

 

 

 

1년 후, 남자 팀은 구단 소유주와 감독의 약속을 지키며, 클럽의 주장 로렌조 펠레그리니가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를 들어 올렸다.

니콜로 자니올로가 네덜란드 팀 페예노르드와의 경기에서 유일한 골을 기록하며, 지알로로시(로마)는 13년 만에 첫 트로피를, 61년 만에 첫 유럽 대회 트로피를 차지했다.

무리뉴는 경기가 끝난 후 "모두가 기대할 때, 승리를 위해 투자를 했을 때 이기는 것은 한 가지 일이지만, 무언가 불멸처럼 느껴지고, 진정으로 특별한 느낌이 있을 때 이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 승리는 로마의 역사에 남을 뿐만 아니라, 내 역사에도 남을 것이다."

그로부터 하루 뒤, 수백만 명의 팬들이 로마의 거리를 가득 메우며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상징적인 승리를 기념했다.

여자 팀 또한 자신의 진전을 이루어냈다. 리그 후반기에 놀라운 성과를 거두며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했다.

 

 

 

 

 

2편에 이어서 !

 

 

 

 

 

- 참고

https://www.asrom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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