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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 아스널 FC를 알아보자!!

devhooney 2025. 4. 14.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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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널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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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 ( Woolwich Arsenal play their first game )

 

1891년에 그 클럽은 프로 구단이 되었고, 몇 년 후 울위치 아스널(Woolwich Arsenal)로 이름을 바꿨다.

런던 축구협회(London FA)는 토트넘 홋스퍼, 퀸즈 파크 레인저스, 밀월 같은 런던의 주요 구단들에게 리그 창설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래서 울위치 아스널은 풋볼 리그에 지원했고, 1893년에 2부 리그에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울위치 아스널은 런던의 유일한 프로 구단이었고, 버밍엄 시티 이남 지역에서 최초로 리그에 가입한 구단이었다.

이들의 첫 리그 경기는 1893년 9월 2일 토요일, 또 다른 신규 구단인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였다. 매너 그라운드(Manor Ground)에서 열린 이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고, 아스널에서는 쇼(Shaw)와 엘리엇(Elliott)이 골을 넣었다.

같은 해, 울위치 아스널은 매너 그라운드로 다시 홈구장을 옮겼는데, 이곳의 가파른 경사로 된 대형 스탠드는 이후 보어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의해 '스피온 콥(Spion Kop)'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즉, 최초의 '콥(Kop)'은 울위치 아스널이 원조였다.

첫 경기 다음 주, 울위치 아스널은 노츠 카운티에게 3-2로 패하며 리그 첫 패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틀 뒤에는 월솔 타운 스위프츠를 4-0으로 이기며 첫 리그 승리를 거뒀고, 이 경기에서 조셉 히스(Joseph Heath)가 리그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 시즌 동안 울위치 아스널은 뉴캐슬과 버튼 스위프츠에게 각각 6골을 허용하며 대패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미들즈브러 아이러노폴리스 원정 경기와 노스위치 빅토리아와의 홈 경기에서는 각각 6골을 넣으며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1893년 10월 14일에는 FA컵에서 애쉬포드 유나이티드를 12-0으로 꺾었는데,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아스널이 FA컵에서 거둔 최다 점수차 승리로 남아 있다.

울위치 아스널은 첫 시즌을 15팀 중 9위(28경기 28점)로 마무리했으며, 첫 리그 시즌 치고는 괜찮은 성과였다.

 

 

 

 

 

5. 역사 ( Club moves from Woolwich to Highbury )

 

아스널이 울위치에서 하이버리로 옮긴 건 야망과 필요성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그 이사가 없었다면, 아스널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고,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 중 하나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1912/13 시즌이 끝날 무렵, 아스널의 재정 상태는 심각했다. 최근 구단 운영을 맡게 된 헨리 노리스는 단호한 결론을 내렸다. “아스널이 잉글랜드 축구에서 강팀이 되려면 반드시 이사를 해야 한다.”

노리스와 윌리엄 홀은 배터시와 해링게이의 빈 터를 알아봤지만 조건에 맞는 곳이 없었다. 하이버리는 템스강 북쪽이라 토트넘과 가까웠고, 이는 노리스가 꺼리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어 관중을 끌어들이기 좋았고, 그래서 결국 하이버리가 유력 후보지가 되었다.

긴 협상 끝에 아스널은 하이버리의 땅을 연간 약 £1,000에 21년간 임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북쪽으로의 이전은 곧 반발을 불러왔다. 토트넘과 클랩턴 오리엔트(당시 호머튼에서 경기 중)는 아스널의 근접에 불쾌해했고, 지역 주민들도 반대했다. 하지만 리그 관리 위원회가 주민과 인근 구단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아스널은 하이버리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1913년 4월 26일, 구단의 마지막 매너 그라운드 경기는 미들즈브러와의 1-1 무승부였다. 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울위치 아스널은 ‘디 아스널’로 알려지기 시작했고(공식 명칭은 여전히 '아스널'), 노리스와 홀은 새로운 홈구장에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다.

불과 4개월 만에 새로운 그라운드는 평탄화 작업이 완료되었고, 새 그랜드스탠드는 일부 건설되었으며, 테라스와 입장 게이트도 설치되었다.

1913년 9월 6일, 아스널은 하이버리에서의 첫 경기를 레스터 포스와 치렀고, 2-1로 승리하며 순조롭게 새 출발을 했다. 조비가 하이버리에서 아스널의 첫 골을 기록했다. 노리스의 다음 목표는 1부 리그 진출이었고, 당시 팀은 이를 이뤄낼 만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하이버리에서의 첫 경기를 치른 지 1년도 안 되어 유럽은 전쟁에 휘말렸고, 노리스의 꿈은 잠시 미뤄지게 된다.

경기 요약
울위치 아스널 2-1 레스터 포스
1913년 9월 6일 토요일. 디비전 2. 하이버리.

골:

아스널: 조비 45’, 디바인 78’(PK)

레스터 포스: 벤필드 20’

아스널 라인업:
Lievesley, Shaw, Fidler, Grant, Sands, McKinnon, Greenaway, Hardinge, Jobey, Devine, Winship.

레스터 포스 라인업:
R.G. Brebner, Clay, Currie, D.S. McWhirter, Harrold, Burton, Douglas, Mills, Sparrow, Benfield, Waterall.

관중 수: 20,000명
주심: J.H. Pearson

 

 

 

 

6. 역사 ( Norris negotiates top-flight return )

 

아스널과 토트넘 홋스퍼의 라이벌 관계는 지리적 위치와 축구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1919년에 있었던 한 가지 결정은 두 클럽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아스널은 제1차 세계대전 전 마지막 시즌(1914/15)에서 2부 리그 6위에 그쳤기 때문에, 전쟁 이후 리그가 재개된 1919년에도 당연히 2부에 남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스널은 1부 리그로 승격되었다.

당시 1부 리그는 두 팀을 추가해 총 22팀으로 확대되었고, 전통적으로 새로 들어올 두 팀을 선출하기 위한 투표가 진행되었다. 이전 시즌(1914/15) 최하위 두 팀도 재선출 대상이었다.

“1910년 클럽이 자진 청산 위기에 몰렸을 때 이를 구한 헨리 노리스는, 당시 리그 회장이자 리버풀 구단주였던 존 맥케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을 받았다.”

아스널의 승격을 둘러싼 가장 큰 루머는 구단주 헨리 노리스가 리그 회장을 '조종'했다는 이야기다. 그는 1913년 아스널을 하이버리로 이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확실한 사실은, 아스널이 10표 차이로 투표에서 승리해 승격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축구계의 전설처럼 회자된다.

진실이 무엇이든, 9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아스널은 1919년 리그 재개 이후 단 한 번도 강등된 적 없는 유일한 클럽이다.

 

 

 

 

7. 역사 ( Herbert Chapman - The great innovator )

 

1925년 여름, 헨리 노리스가 아스널에 새로운 감독이 필요하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그 선택이 앞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허더즈필드 타운에서 1920년대 초 FA컵 우승과 디비전 1 우승 두 번을 이끈 허버트 채프먼은 1925년 여름, 아스널 감독직을 수락했다.

이전 시즌 강등 위기를 겪었던 아스널은 채프먼의 지휘 아래 즉각적으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하이버리에서의 첫 시즌에 그는 아스널을 FA컵 8강과 디비전 1 2위로 이끌었고, 이는 구단 역사상 가장 높은 리그 순위였다.

1년 만에 아스널은 1927년 4월 23일, 구단 최초로 FA컵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그 날은 다른 이유로 더 유명하다. 웸블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카디프 시티에게 1-0으로 패하며, FA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잉글랜드 밖으로 나간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프먼은 그로부터 3년 후, 웸블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옛 팀 허더즈필드를 꺾고 아스널에 FA컵 첫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이 우승은 아스널의 전성기 시작을 알렸고, 알렉스 제임스와 클리프 바스틴 같은 스타들이 가세하며 아스널은 전 세계 축구 팬들의 부러움을 샀다.

다음 시즌, 아스널은 구단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을 기록했고, 당시로선 기록적인 66점을 획득했다. 1931/32 시즌에는 커뮤니티 실드를 차지했지만, 리그에선 에버튼에 2점 차로 밀렸고 FA컵 결승에서는 뉴캐슬에게 2-1로 패하며 더블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아스널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 시즌인 1932/33 시즌, 새롭게 빨간색 셔츠에 흰 소매를 입기 시작한 아스널은 디비전 1 우승을 다시 차지했고, 이 시즌 유일한 아쉬움은 FA컵에서 3부 리그 팀인 월솔에게 당한 충격적인 패배였다.

하지만 그 실망은 곧 다가올 비극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1934년 1월, 채프먼은 감기에 걸린 상태로 아스널 3군 경기를 관전한 뒤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폐렴이 찾아왔다. 그리고 1934년 1월 6일 새벽, 그는 런던 헨던의 자택에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아스널의 성공까지 끝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긴 기반 위에서 구단은 계속해서 성장했다. 같은 해 5월에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감독직을 맡은 조지 앨리슨 아래에서 1934/35 시즌엔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2시즌 동안 리그 우승은 없었지만, 1936년 4월 25일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테드 드레이크가 결승골을 넣으며 구단 역사상 두 번째 FA컵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시즌, 아스널은 다시 한번 리그 챔피언에 오르며 8시즌 동안 다섯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8. 역사 ( Herbert Chapman is appointed manager )

 

1925년 여름 허버트 채프먼의 선임은 아스널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축구 클럽으로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버트 채프먼은 성공적인 허더즈필드 타운을 이끌던 중 아스널 회장 헨리 노리스의 제안을 받고 팀을 옮겼다. 그는 1925/26 시즌에 아스널을 1부 리그 2위로 이끄는 데 성공했지만, 1920년대 후반은 대부분 중위권에서 머무는 시기였다. 1927년에는 구단 역사상 첫 FA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카디프 시티에게 1-0으로 패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리그에서는 고전했지만 채프먼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혁신적인 전술과 데이비드 잭, 클리프 배스틴, 알렉스 제임스, 에디 햅굿 같은 탁월한 영입은 1930년대 초 아스널을 가장 두려운 팀으로 탈바꿈시켰다.

"채프먼의 가장 위대한 발명은 3-2-2-3 ‘WM’ 포메이션이었다. 이 전술은 상대를 무력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고, 많은 영국 팀들이 이를 채택하면서 잉글랜드 축구의 양상 자체를 바꿔놓았다."

1930년, 아스널은 FA컵 결승에서 채프먼의 친정팀 허더즈필드를 꺾고 첫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해부터 아스널은 본격적으로 전성기에 접어들었고, 1930/31 시즌엔 구단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 업적은 두 해 뒤 한 번 더 반복되며 아스널의 지배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번째 리그 우승은 채프먼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1934년 1월, 그는 감기로 세 번째 팀 경기를 관전한 뒤 상태가 악화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였다. 그가 만든 팀은 그 뒤로도 리그 3연패를 달성하며 전성기를 이어갔지만, 그는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의 업적은 트로피에만 그치지 않는다. 채프먼은 아스널뿐 아니라 축구 전체에 혁신을 일으킨 인물로 기억된다.

그의 발명은 다음과 같다:
- 페널티 박스 반원 도입
- 골 판정 심판과 제2심판 제안
- 야간 경기를 위한 조명 사용 제안
- 전자식 입장권 기계 개발
- 관중에게 팀 정보를 전달하는 PA 시스템
- 편지 및 숫자 조합 점수판 도입 (50년 넘게 전국에서 사용됨)

그 외에도:
- 하이버리 시계탑(Highbury Clock) 설치
- 하얀 소매 유니폼(서로를 쉽게 알아보도록)
- 유럽 투어 추진
- 유소년 클럽(피더 클럽) 운영
등 많은 혁신을 이끌었다.

그리고 아스널 팬이라면 절대 잊지 못할 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지하철역 이름을 바꾼 것이다.

채프먼은 하이버리 북단의 ‘길레스피 로드(Gillespie Road)’라는 애매한 이름 대신 “여긴 아스널이다!”라며 지하철역 이름을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섰다. 이 아이디어는 그가 1913년 리즈 시티 감독 시절 하위 리그의 아스널을 방문하면서 처음 떠올렸다. 이후 수개월간의 로비 끝에, 1932년 10월 31일, ‘아스널(Arsenal)’이라는 이름이 런던 지하철 노선에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 장의 티켓, 노선도, 표지판, 기계 등이 모두 새로 교체됐다.

허버트 채프먼은 단순한 감독을 넘어, 아스널을 지금의 아스널로 만든 인물이자, 현대 축구의 기틀을 세운 선구자였다.

 

 

 

 

 

3편에 계속!

 

 

 

 

 

- 참고

https://www.arse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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